중세 초기
로마 제국이 저물기 시작한 4세기쯤부터 게르만 민족이 각지에 침투하여 새로운 지배자로서 군림했다. 로마 전역에 퍼져 있던 기독교는 이 게르만족 사이에도 깊이 침투되어 있었다. 이교를 믿고 있던 게르만의 지배자도 점차 가톨릭교로 개종하여 이윽고 프랑크 제국을 중심으로 서구권 특유의 기독교 미술이 개화하기 시작했다.
그리스와 로마제국이 붕괴하던 시기부터 로마네스크 미술이 생겨나기 직전까지의 사이를 미술사에서는 넓은 의미로 중세 초기라고 부른다. 최근에는 8세기 중반을 경계로 전기를 메로빙거 왕조 시대, 후기를 카롤링거 왕조 시대로 구분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전기의 특징으로는 강력한 통일국가가 없으며 토지개발도 충분히 진척되지 않아 지역마다 문화 차가 컸다는 점이 있다. 중세 초기란 개별적인 문화권을 통합하여 일컫는 명칭이기도 하다.
전기 메로빙거 왕조의 미술
메로빙거 왕조의 미술은 고전의 미술과 중세미술을 잇는 중간쯤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시대에는 갈리아, 게르마니아, 비지고트, 브리타니아 등 각각의 민족이 서로 다른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구 로마제국의 지배가 강했던 지역에서는 고전 양식에 기반하여 사실성이 강한 기독교 미술이 태동하였다. 알프스 북쪽이나 에스파냐에서는 동북부 지역으로 이동한 게르만 민족과 그 땅의 원래 주인이었던 켈트족이 가지고 있던 추상감이 장식성과 결합한 조형이 도드라졌다.
프랑크 왕조는 5세기경부터 종교 건축물의 건립을 지원하기 위해 시작했다. 오늘날에는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예시를 찾아보기 힘들지만, 프랑스 지방에 남아있는 대성당은 이미 이 시대부터 존재하던 건축물이다. 이때의 교회는 바실리카 식으로 많이들 지어졌다. 석재를 쌓아 올리던 로마의 건축 방법에 따라 기둥머리가 있는 건축양식을 사용하였는데, 목재 사용 기술이 뛰어났던 게르만인은 토착 기술인 로마의 건축양식까지도 병용하였다. 이 건축 방식에서 지분은 주로 목조로 지어졌다. 갈리아~게르마니아 지방 교회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고유한 종탑 양식도 목조기술의 산물이며, 후일 유럽 중앙~북방 교회에 없어서는 안 될 시설이 되었다.
7세기에 들어서는 수도원이 많이 만들어졌기에 나라마다 대수도원 건축이 시작되었다. 서쪽의 고트족이 이주한 남프랑스와 비지고트에서는 비잔틴 제국과의 접촉이 잦았다. 이에 영향을 받아 교회 건축에도 오리엔트 한 양식이 출현하여 석조 아치 구조와 돔 형식도 건축에 쓰이게 되었다. 내부는 동방 양식에 따라 호화로운 모자이크나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생피에르 사원의 벽화 등은 그 시대 건축 양식의 잔재라 할 수 있는 것인데, 자연주의적인 표현 기법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특징이 있다.
남부에서 발전한 조각은 석관이나 기둥머리에 고대 로마의 모습이 남아있는 반환조 기법으로 그 지역의 전설이나 기독교적인 도상을 남겼다. 갈리아 이북에서 발견되는 석관과 석비 표면에는 자연주의적이고 사실적인 기법 사용이 나타남과 동시에 평 부조 형식 또한 나타나 조각에 입체적인 표현 방식이 드러나지 않는 민족 특유의 특징을 보여 준다. 이때 새겨진 도상의 주위는 소용돌이나 꽈배기 무늬로 장식되어 있는 경우도 잦았다.
점차 시간이 흘러 8세기에서 9세기쯤 북이탈리아와 지중해에서 활약한 노르만인의 영향을 받아 게르만 기법과 동방적 환조의 융합으로 생긴 석조물의 반부조 형식이 재차 떠올랐다. 또한 서유럽 일대에 로마 형식을 딴 석관 조각 제조법이 조금씩 보급되며 이는 후일 로마네스크 조각으로 옮겨 간다. 이즈음부터 성행한 수도원 활동 중에는 직업 예술가가 신을 찬양하는 제사 도구와 성전 제작에 봉사하는 풍조가 있었다. 이는 칠보와 금 공예품, 상아조각, 사본 삽화 장식 등으로 대표된다.
게르만인은 위와 같은 공예 기술이나 색채 방면에 뛰어난 성향을 보였다. 게르만인들은 장신구와 무기 위에 메인 재질을 살린 기하학무늬, 곡선 무늬, 공상 동물무늬 등을 새겨 넣어 물건 자체만으로도 뛰어난 장식미를 표현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게르만인들이 종교 미술의 제작에 뛰어들며 종교 공예는 중세 초기 미술사 중에서도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금공예와 칠보 제작 기술은 단순한 선이 만들어내는 미적인 윤곽선에 둘러싸인 편편한 면 특유의 느낌을 만들어내며 사본 삽화 예술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쳤다.
켈트 미술
켈트인은 중부~북부 유럽의 원주민이었다. 켈트인 특유의 조형적 특질은 그리스~로마로 대표되는 지중해 민족의 자연주의적인 표현법에 비해 직선과 곡선의 조합 혹은 나란히 배열되는 추상적 장식표현이다. S 자무늬, 소용돌이 문양, 나선무늬, 꽈배기 무늬는 위 사례를 대표하는 모티프이다. 켈트의 문양들은 장식으로 사용되는 동시에 그들의 문화 전반을 아우르는 종교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고 해석된다. 기독교가 켈트인의 영역에 침투하였을 때, 지역적이고 토착적이었던 장식 요소는 본디 가지고 있던 종교적 의미를 유지한 채 기독교 미술에 흡수되었다. 혹자는 기독교가 전파된 지역의 지지를 얻기 위해 수용하고 동화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켈트 미술의 모티프에는 라틴 민족의 미술에서 발견할 수 없는 동물무늬와 괴수 무늬를 발견할 수 있다. 이 문양들은 켈트인들이 랄스키타이족과 왕래하였을 때 전승된 것이라고 전해진다.
후기 카롤링거 왕조의 미술
8세기 말의 위인인 카롤루스 대제(샤를마뉴)는 스스로 서로마 황제의 왕관을 쓰고 고대 로마의 시기가 다시 도래하기 기대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다양한 정책을 펼침과 동시에 문화적인 부활 또한 시도하며 서쪽을 대표하는 그리스도 교권의 지도적 지위를 구축하였다.
수도 아헨에는 앨퀸과 아인하르트 등 당대의 유명한 학자들을 등용하여 각지의 스승과 제자를 불러 모아 학문과 예술의 중심으로 삼았다. 조형예술도 이 시기의 학예 운동에 포함되어 활발하게 발달하였다.
이보다 앞서 대제의 부친인 피핀이 756년에 라벤나를 법황령으로 기증하여 궁정과 교회가 결탁하였다. 이를 통하여 기독교 미술은 신을 믿는 사람들이나 교단 안에서만 만들어지던 폐쇄적인 분위기에서 벗어났다. 사회적인 분위기와 더불어 중세 시대의 미술 또한 당시에 점차 확립되어 가던 봉건제도 내의 궁정이나 영주의 권력을 배경으로 제작되는 미술로 그 성격이 변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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